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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이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한 16일 오후 인천시 옹진군 대연평도에서 해병대원들이 경계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2020.6.16 (사진=연합뉴스) |
일본은 우방으로, 북한은 적으로 규정된다. 그것도 단순한 적이 아닌 ‘주적’이다. ‘주적’이란 문자 그대로 ‘주된 적’을 의미한다. 주적 개념은 국방의 상대, 즉 국가를 위협하는 주된 세력을 명시해, 누구로부터 나라를 지켜야 하는지를 분명히 밝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북한이 주적이 되었는가? 남침으로 동족을 살상하고 전쟁 피해가 너무 컸기 때문일까? 그러나 북한은 남침이라 하지 않고 북침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지금도 북침설·남침설·유도설을 두고 설왕설래가 이어지고 있다.
언론인 아이.에프. 스톤(IF Stone)은 1952년 발표한 저서에서 6·25 전쟁을 “몰락 위기에 처한 이승만 정권을 지키고 미국의 대공산권 봉쇄 전략을 실행하기 위해 벌어진 거대한 음모”라고 정의했다. 또한 『한국전쟁의 기원』을 쓴 브루스 커밍스는 “전쟁을 누가 시작했고 어떻게 시작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며 “우발적으로 벌어진 소규모 국지전이 확대되면서 국가 간 전면전으로 비화되었다”는 교전 확대설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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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 전쟁이 남긴 초상. 흥남, 밧줄 사다리에 매달려 수송선을 기어오르는 피난민들 1950.12.19 (제공=연합뉴스) |
■ 6·25 전쟁 중 남북의 희생자 수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1개월 2일 동안 벌어진 6·25 전쟁은 엄청난 희생을 낳았다. 국방부와 군사편찬연구소의 자료에 따르면, 전쟁 기간 한국군 사망자는 13만 8천여 명, 부상자는 45만여 명이며, 실종자까지 포함하면 60만 9천여 명에 달한다. 북한군은 사망자와 부상자가 52만여 명, 실종자까지 포함하면 80만 명에 이른다. 유엔군은 사망자 5만 8천여 명, 부상자 48만여 명, 실종자와 포로까지 포함하면 총 54만 6천여 명, 중공군은 사망자 13만 6천여 명, 부상자 20만 8천여 명, 실종자·포로·비전투 사상자까지 모두 합하면 97만 3천여 명이나 된다.
민간인 피해는 더욱 참혹하다. 남한에서만 사망자 24만 5천여 명, 학살된 민간인 13만여 명, 부상자 23만 명, 납치 8만 5천여 명, 행방불명 30만 3천여 명으로 모두 100만여 명에 이른다. 북한 민간인 사망자는 28만 2천 명, 실종자는 79만 6천 명이다. 한국전쟁 유족회와 학자들은 학살된 한국인만 100만 명에 달한다고 추정한다. 결국 남북한 전체 인구의 5분의 1이 피해를 입었으며, 한 가정마다 최소 한 명 이상이 전쟁으로 희생된 셈이다.
사회·경제적인 피해도 컸다. 남한은 공업 시설의 40%가 파괴되었고, 북한은 전력의 74%, 연료공업의 89%, 화학공업의 70%가 피해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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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유산 등재된 일본 사도광산 내부 모형 (사진=연합뉴스) |
■ 동족끼리 싸워 죽고 죽이고...
이민족의 침략으로 치른 전쟁도 아닌데, 동족끼리 죽고 죽이는 참혹한 비극은 동서양사를 통틀어 찾아보기 어렵다. 누가 먼저 침략했는가를 떠나, 침략자는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을 저지른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은 우리에게 무엇을 했는가?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 시작해 1945년 8월 15일 패전까지, 일본 제국은 34년 11개월 18일(총 1만 2,770일) 동안 조선을 강제 점령했다. 그 기간 조선인은 어떤 피해를 입었을까?
노동자·군인·군속으로 강제 동원되거나 전장으로 끌려간 한국인은 104만 9,475명에 이른다. 1941년 일제는 ‘국민근로보국령’을 제정해 학생, 농민, 재소자까지 동원했다. 학도보국대·남방파견보국대·농민 보국대 등이 조직되었고, 1938년부터 1944년까지 762만 명이 철도·도로·비행장·신사 건립 등에 강제 노역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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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공기 제작소로 끌려갔던 근로정신대원들의 모습으로 미국 국립문서기록청 보관 자료. 2017.8.8 (사진=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제공, 연합뉴스) |
■ 근로정신대로 끌려간 조선 여성 20만 명
2차 세계대전이 격화되면서 일본은 전시 체제 속에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근로정신대’를 조직했다. 1943년 8월 23일 여자정신근로령이 공포되면서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미혼 여성들이 강제로 군수 공장 등에 투입되었다. 근로정신대로 동원된 여성은 약 20만 명이며, 그중 조선인은 5만~7만 명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군은 전쟁 기간 여성들을 강제로 연행하거나, 기만·납치·매수 등의 방법으로 성적 노예로 만들었다.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하루에 30회 이상 성행위를 강요당하기도 했다. 전국적으로 성노예로 차출된 조선 여성은 약 20만 명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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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동대지진 참사 당시의 조선인 학살 장면. (사진=해외교포문제연구소 제공, 연합뉴스) |
■ 일본이 우리 민족에 저지른 죄
문화재청에 따르면 일본·미국·프랑스·영국·러시아 등 20개국에 흩어진 우리 문화재는 약 7만 5천여 점이다. 이 중 일본에서만 3만 5천여 점이 확인된다. 일제는 경주·부여·공주·평양 등지에서 고분을 불법 도굴했고, 조선총독부가 반출하거나 일본인이 약탈한 문화재는 공식적으로만 4,479점에 달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수를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1923년 관동대지진 때는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유언비어가 퍼지며 6천6백 명의 한인이 학살당했다. 해방 직후에는 한국인 피징용자를 태운 일본 해군 수송선 우키시마마루(浮島丸)가 폭침되어 5천여 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다.
일제가 남긴 잔재는 해방 후에도 이어졌다. 1948년 해방 정국에서 이승만 정부 경찰의 80%는 일제 경찰 출신이었다. 경찰 최고직인 치안감을 비롯해 고위 간부 다수가 일제 경찰 출신으로 채워졌다. 이승만 정권 12년간의 각료 115명 가운데 독립운동가는 12.5%에 불과했고, 부일 협력 전력자는 34.4%에 달했다.
그들은 해방 이후에도 정치·경제·사회·교육·언론·문화·종교 등 각 분야에서 기득권을 유지했고, 지금도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과 역사 왜곡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친일 세력의 미청산은 분단을 고착화하고 독재 권력을 유지하는 기반이 되었으며, 오늘날에도 그 잔재가 사회 곳곳에 독버섯처럼 남아 있다.
일제가 저지른 만행은 종이에 다 기록할 수도 없을 만큼 방대하다. 그런데도 일본은 ‘우방’으로 불리고, 북한은 ‘주적’으로 낙인찍힌다. 과연 이것이 정당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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